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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톺아보기

[서평] 소설 <농담>, 밀란 쿤데라 지음 - (2)

 '[서평] 소설 <농담>, 밀란 쿤데라 지음 -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1968년, 밀란 쿤데라의 TV 인터뷰 영상

√. 소설 ≪농담≫ 속 「우스꽝스러운 사랑들」 - 사랑과 사회비판

√√. 마르케타와 루치에의 이야기 - 농담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랑. 그리고 타락.

쿤데라의 첫 소설 《농담》의 주인공들의 사랑도 다소 우스꽝스럽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사랑들》의 전초전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루드빅과 마르케타의 사랑은 나름대로 순수하고 청초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얼뜬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즉, 사랑 그 자체 혹은 사랑 그 내부를 본다기보다 외부를 둘러싼 외적 요소들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불완전하고 위태한 사랑이다. 내면이 아닌 외면에 치중하는 사랑이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루드빅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 마르케타를 생각할 때 내가 중학생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감정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유래했다기보다 내가 서투르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그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러 마르케타 자체보다도 훨씬 더 내 감각과 생각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속의 구절을 빌려 루드빅을 표현하자면, 그는 한 작품의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바이올린 기법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는 어린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마르케타에 대한 루드빅의 왜곡된 심사는 그의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 그리고 마르케타의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성격과 충돌해 대재앙을 낳았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이데올로기의 늪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빠져있던 이데올로기(사회주의)에 따르면 남녀 간의 사랑은 당과 국가에 대한 사랑에 앞설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마르케타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고 적힌 루드빅의 엽서를 학생위원회에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엽서에 적힌 내용은 “바보 같이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갖은 루드빅의 장난이었다.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마르케타를 놀려줄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난은 장난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걸어야 하는 법. 이 점에서 루드빅은 크나큰 오판을 했던 것이다. 그 대상이 ‘마르케타’라는 사실을. 결국 마르케타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당국의 요구에 따라 엽서를 내 놓았다. 이로 인해 루드빅은 당원 자격이 박탈되고, 대학생 신분이 빼앗긴 채 검은 배지를 달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수용소와 탄광을 전전하게 된다.

 사회비판 : 이러한 마르케타와 루드빅의 사랑은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특히 사회주의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개개인’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은 규율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사적인 영역은 없고 모두 개방되어서 숨김 없이 ‘까발려야’ 한다는 사회주의에 대한 쿤데라식의 조소인 것이다. 간간히 등장하는 직설적인(사실적인) 독백(묘사)와 볼트체로 강조된 문구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 루드빅과 루치에의 사랑 - 영혼 없는 육체적 사랑. 그것의 파멸적 종지부.

공과 사의 일치를 부르짖는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랑 역시 당사자 이외의 인민들에게 투명해야 했다. 루드비은 이러한 사회주의적 사랑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고, 첫사랑에 실패했다. 그는 이러한 실패를 발판 삼아 새로운 사랑을 쌓는다. 새로운 사랑은 철저히 비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비이념적인 것이었다. 그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이 바로 ‘루치에’였다.

그에게 다가온 루치에의 매력은 당에 대한 열정도, 나라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루치에는 너무 평범했고 가난―도리어 바보 같기도!―했다. 그래서 루드빅은 되레 루치에에게 끌렸다. 그녀는 “역사를 이끌어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에 젖어서, 잔 다르크처럼 뛰쳐나가 혁명의 중앙에 서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루치에는 단지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위에 호젓이 서 있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루드빅은 이렇게 평범한 여인에게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루치에, 그녀가 이 역사의 거대한 날개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 날개 소리가 희미하게 그녀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면 아주 어렴풋이 짐작이나 했을까. 그녀는 역사의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역사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역사에 대한 갈증도 없었다. 거대하고 일시적인 일들은 전혀 몰랐고, 다만 작고 영원한 자신의 문제들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나, 나는 그렇게 단번에 해방되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회색빛 낙원에 데려가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한순간 전만 해도 그렇게 두렵게 보였던 그 발걸음, <역사의 바깥으로> 나를 이끌었던 발걸음이 갑자기 내게 안도와 행복의 발걸음이 되어 있었다. 루치에는 수줍게 내 팔을 잡았고,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구원의 여신으로서의 루치에 역시, 그가 육체적인 사랑에 집착하자 금세 절망의 여신으로 분하고 만다. 게다가 루드빅은 루치에를 ‘역사 위’에서의 도피처로써 생각하다보니 또한 도피처의 여신 정도로밖에 치부되지 못하게 되었다. 속이 배제된 외면의 사랑만큼이나, 육체에만 집착하는 사랑 역시 파탄과 절망과 혐오와 고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치에의 성폭행 트라우마와 루디빅의 (루치에가 새로운 옷을 입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된) 육체에 대한 광적인 갈망은, 이미 그 시작부터 비극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육체와 정신이 온전히 어우러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결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들 역시 우스운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비판 : 작가 배수아의 《독학자》를 떠올렸다. 작가 배수아가 그의 저서 《독학자》에서 80년대 말의 광기에 찬, 맹목적이고, 편협한 집단 이데올로기에 쌓여서 제 스스로 제 살을 깎아 먹던, 목적은 잃어버린 채 형식과 과정만을 중시하는 대학생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어퍼컷을 날려주었듯이 쿤데라도 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이고, 목적을 잃어버린 광기에 냉소를 날려주었던 것이다. 경쟁적으로 변화의 중심에 서려하고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기 그리고 ‘무식함’을 쿤데라는 아니꼽게 여겼다. 역사의 중심에 서려는 과욕을 탈피하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모두 이로울 수 있다. 이는 패배주의나 피해망상에서 나온 소심함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중심으로 가려는 과욕의 끈을 끊지 않는 이상, 루치에와 같은 파국은 면할 길이 없다.


√√. 루드빅과 헬레나의 사랑 이야기 - 인간의 인간에 대한 늑대

하지만 이보다 더 얼뜬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루드빅과 헬레나의 사랑 이야기이다. 루드빅과 헬레나의 사랑은 루치에와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루드빅과 루치에의 사랑이 다소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요소가 많은 반면에, 헬레나와의 사랑은 다분히 희극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루드빅의 헬레나에 대한 사랑은 대단히 가학적이고 정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헬레나의 사랑이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수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루드빅 스스로가 자신을 파멸시킨 주범으로 꼽은 ‘파벨’의 아내, 헬레나를 취함으로써 파벨에 대한 복수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 스스로 이야기 했듯이 충분히 “야비한 짓”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계속하기를 명했다. 그녀를 쾌락에서 쾌락으로 몰아가기를, 그녀의 몸이 모든 자세를 다 취하도록 만들어 부재하는 그 제3자가 바라보았던 모든 시선의 각도를 그늘 아래 감춰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명했다. [……] 여기에 없는 그 제3자의 기억 속에 그녀가 새겨지게 만든, 각인처럼, 도장처럼, 숫자처럼, 상징처럼 그렇게 새겨지게 만든 그 경련을 계속 되풀이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비밀스런 숫자를 훔치는 것! 그 옥새를! 파벨 제마넥의 비밀의 방을 약탈한다! 구석구석까지 모두 뒤져내고 난장판을 만들어놓는다!

 

루드빅은 제마넥의 침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엽기적인 사디즘-마조히즘이었다. 그는 헬레나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켜, 헬레나의 육체를 극한의 오르가즘 상태까지 끌어올리려 애썼다. 또한 그것을 지속시켰다. 그들이 행하는 피상적 사랑은 실상 사랑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정략적으로 다가간 루드빅에게서 시작된 사랑이었기에, 헬레나의 심정이 어쨌든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의 ‘피상적이고 변태적인 사랑’은 그렇게, 사람을 물화(物化)하고 철저히 비인간화했다.

 

한 번 더 내려치고, 다시 한 번 세 번째로 내려쳤다. 헬레나는 흐느껴 울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으나 결코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내게로 턱을 쳐들고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었으며, 나는 그녀를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잠시 후에 보니 내게로 불쑥 솟아오른 것은 얼굴만이 아니라 가슴도 그랬으며, 나는 (그녀 위에 버티고 앉아) 기세 좋게 힘껏 그녀의 팔을 허리를 가슴을 내리쳤다.

 

소위 ‘사랑의 파트너’의 육체를 ‘사랑’을 빌미 삼아 변태적으로 주무르고, 가학적으로 (정략성에 의해) 일종의 폭력을 가한 루드빅은 응당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물론 ‘그의 폭력’이라고 규정지어진 것이, 헬레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큰 육체적 기쁨이 되었다고는 하나, 인간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다른 인간에게 접근했다는 점 등의 악랄함은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른다. 육체적 쾌락의 경지를 맛본 헬레나는 루드빅에서 사랑을 고백하려하고, 자신의 아내를 평소 귀찮아하던 파벨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냉큼 헬레나를 루드빅에게 떠넘겨 버린 것이다.

 

 사회비판 : 인간의 수단화와 물건화가 초래하는 파국은 전체주의 체제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쿤데라 본인의 지적처럼 "중대한(비상하고 비인간적인)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사적인(매우 일상적이고 매우 인간적인) 상황들을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동일하였던 것“이다. 역사가 인간에게 가하는 방식 그대로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함이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맹목적 전체주의에 의해서 희생당한 루드빅과 《농담》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공산당)에서 당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고 결국, 이러한 유의 인간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늑대’로 전락했다. 결국, 쿤데라는 이를 통해 ‘공사(公私)일치’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가 결국은 그것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으며 그 잔혹성 때문에 스스로 파괴되고, 인간까지도 파괴시킬 것이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 코스트카와 루치에의 사랑, 그리고 야로슬라브와 블라스타의 사랑

코스트카와 루치에의 사랑, 그리고 야로슬라브와 블라스타의 사랑은 일견, 종전의 루드빅의 사랑과는 달라 보인다. 우선, 코스트카의 루치에에 대한 애정은 대단한 것이어서 루드빅이 하지 못했던 영혼-육체의 일치된 사랑을 구현해 냈고 남성에 대한 혐오와 공포 속에 살던 루치에를 ‘구원’해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다음으로 야로슬라브와 그의 아내 블라스타 사이의 사랑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미 부부이며, 흠 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체코의 이상적인 가족상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안다. 코스트카는 “(루치에에게) 구원을 날라다 주는 천사인 양 행동하다가 그토록 몹쓸 짓을 하고 그녀를 유린한 유혹자”로 전락했으며, 야로슬라브의 내면에는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마음과 아내에 대한 마음이 부딪혀 결국 표면적으로도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치고 말지 않던가 말이다.

 사회비판 : 결국은 이상적으로 보이던 코스트카 역시 루드빅이 루치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성적 물건화 했다. 루치에 입장에서 보자면, 코스트카나 루드빅이나 그 전에 자신을 범했던 남자나 다 똑같은 ‘늑대’일 뿐인 것이다. 이는 헬레나와의 에피소드에도 적용된다. 결국 ‘인간의 인간에 대한 늑대’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까. 이런 우스꽝스럽고 ‘비윤리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사회주의의 전체주의가 아니던가. 쿤데라는 다시 한 번 비꼬아준 것이다.

야로슬라브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고민하는 ‘전통문화’와 ‘아내(가정)’은 크게 보자면, ‘사회주의적 규율’과 ‘사적인 양심’이 된다.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쿤데라는 또 다시 비꼬아 준다. 역시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