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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톺아보기

[스크랩] 가뭄의 세대


신문 아카이브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동아일보 1965년 6월 10일 목요일 자에 실린 문학평론가 '홍사중'의 글인데요. 그는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그 세대를 '가뭄의 세대'라고 규정하고 있네요. 말미에 그는 "그러나 이 두려운 가뭄의 세대 다음에 등장하는 내일의 세대의 모습은? 그것은 분명 오늘의 풍경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과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나름 읽을만한 가치가 있어서 스크랩해왔습니다.

[作壇時感] 가뭄의 세대 - 문학평론가 홍사중

몇달째 비를 보지 못 하고 있다. 보리가 타고, 땅이 갈라지고 우물이 마르고, 기우제는 몇 번인가 있었어도 가뭄은 언제나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가뭄은 먼지로 뒤덮인 초하의 포도위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날로 황량해지기만 하는 인간의 정신의 내면마저 오히려 가뭄은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의 정사를 그저 지난날의 관습대로 낭만과 꿈속에 곱게 파묻어 놓지 못하는, 도는 하나의 미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것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빼앗고, 인간의 살 집을 무너뜨려가며 있는 한국의 괴기한 정치의 「메카니즘」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오늘의 세계가 신성의 광휘와 인간성의 윤기를 잃은지는 이미 오래된다. 저 역사의 어둡고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 보며 불안에 떨던 때도 지났다.

오늘의 인간은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불안의 뿌리가 완전히 가신 때문도 아니다. 불안이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인간은 불안을 느낄 힘마저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옳은 말인지도 모른다. 문명이 모든 것을 단순한 구조식으로 분해시키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파스칼」이나 「도스토엡스키」의 「다이나믹」한 힘은 있을 수가 없다.

「스위스」의 철인 「피카아드」가 말한대로 혼자의 힘으로는 도주를 위한 힘도 없고, 그것을 꾀할 수도 없는 것이 가뭄철에 사는 인간의 모습에 다름 없는 것이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사상계)의 주인공은 삶의 의미르 찾기에 지친 그러면서도 그 의미의 추구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토마스 만」이 <환멸>에서 그려낸 세계처럼 그네들의 마음에는 몹시도 가뭄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이제 겨우 스물다섯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도 「너무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젖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뭄의 세대의 생리인지도 모른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번째 등은 불이 켜있지 않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둘레에서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때에는 서대문 「버스」정거장에 사람이 몇 명이나 서 있는가를 헤어보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 이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뭄의 세대, 그것은 가뭄의 계절에만 있는 세대다. 그것은 또한 정의의 가면 아래 부정이 이루어지고, 권력과 권리가 혼동되던 계절 다음에 찾아든 계절이 마련해놓은 새로운 세대의 어두운 표정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은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까지 나타난 그 어느 작품보다도 냉혹하게 젊은 세대의 황량하게 가뭄을 탄 마음의 풍경을 그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잃고, 또는 그것들을 마련해 낼 의지까도 상실하였다는 것은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세대)를 보면 꼭 젊은 세대 안의 얘기는 아닌 듯하다.

「로렌스 듀렐」의 <알렉산드리아 4중주곡>은 「영국의 죽음」으로부터 도주를 위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본딴 <소설 알렉산드리아>도 한국의 어두운 현실로부터의 도주행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사상이란 인간을 부자연하게, 그러니까 불행하게 만드는 작용 이상도 이하도 하는 것"이라는 자조를 거쳐서 이 도주행이 끝내 이른 곳은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말의 무력성에 대한 뼈저린 인식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 삼은 것은 결국 도주는 불가능하다는, 그러한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마치 <서울 1964년 겨울>이 오늘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알려주고 있듯이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행복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행복을 누린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10년형을 받은 사람을 의식하면서 소 「알렉산드리아」의 지상천국을 찾아든다는 그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 현실변혁에의 적극적인 의지는 사람을 감옥으로 몰아 넣고 권력에의 순종이나, 현실에의 편승은 행복에의 통행증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역리적인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뼈저린 인식은 그저 행복과 자유에의 권리를 스스로 방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정말로 서글픈 가뭄의 계절이다.

분노하다 지친 꿈꾸기에도 지친 사람들의 가슴은 「알렉산드리아」의 광장을 비치는 태양이 뜨거울수록, 하늘의 성좌가 찬란할수록 더욱 황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너무나도 서글픈 대비가 빚어내느 감정에도 무감각해진 것이 오늘의 가뭄의 세대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요즘의 작가들이다.

오늘의 우리네 삶은 이러한 풍경에 뒤덮인 채 끝날 것만 같다. 적어도 그런 것이 오늘을 사는 가뭄의 세대의 모습이다.

이처럼 두려운 것은 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두려운 가뭄의 세대 다음에 등장하는 내일의 세대의 모습은? 그것은 분명 오늘의 풍경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