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젊음은 나아가는 것 - 행진, 아날로그 소년
'행진'. 너무나 익숙하지 않는가? 초중고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두 번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애국이니 국민이니 하는 조회에서 끝나지 않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들은 후, '지겨운 조회시간'의 파를 알리던 그 알림소리. 행진곡. 그래, 행진곡이다. 우리는 학교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에 맞춰 줄줄이 교실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했다.
아날로그소년의 첫 정규앨범의 타이틀은 이 <행진>이다. 한자로 적으면 行進. 국어사전엔 이 상투적인 단어를 '(명) 줄을 지어 앞으로 나아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행진은 같이 나아간다는 뜻이란다. 같이 걷는데에는 규칙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역동적이다. 행진은 노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0대에겐 행진이어도 70대에게 행진이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행진은 젊다.
나는 그래서 윤종신의 12집 '행보'를 떠올렸다. 일상다반사의 음악화에 있어서만큼은 국내 최고의 실력자 윤종신의 가장 최신 앨범. 그는 왜 '행진'이 아닌 '행보'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일까? 그래, 윤종신이 '행진'을 말하기엔, 이미, 늙어, 버렸던 것이다. 행보(行步)를 국어사전에서는 '(명)걸음을 걸음. 또는 그 걸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래, 소요다. 행진은 거침없으니 치기 어리고 행보는 유약한 듯하나 걸음 하나의 무게가 크다.
나는야 청춘힙합! 그리하여 行進!
'아날로그소년'은 4년 전 첫 번째 EP인 <정거장>을 내놓으며 우리 곁으로 왔다. 그의 첫 번째 정거장(무대)는 홍대였다. 그가 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이 아니었고, 그의 정거장 역시 아는 사람만 찾는 외롭지만 외롭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음악을 '청춘힙합'이라고 자인했다. '청춘힙합'을 새로운 장르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분명한 건, 그가 지향하는 음악적 목적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는 청춘을 예찬하고, 청춘을 고양하며, 청춘을 그리워한다.
청춘이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시린 단어다. 나는 '청춘'의 복판에 있으면서도, 청춘이란 곧 취업전선이며 자본주의의 노예이며, 88만원은 인생의 상한점이라고 은연 중에 배워왔다. 반항은 소용없다. 다만 거대한 자본 아래 순응이 있을 뿐이며, 청춘은 단지 스펙을 쌓는 기간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그렇게 시나브로 뜨거운 심장을 애써 식혀왔다. 나는 그래서, 특히, '힙합'을 표방했기에 '어둡'고 '사회고발적'이고 '자극적'일 줄 알았다. 여느 인디 음악이 그래왔기에. 고양하기보단 절망해왔기에. 그걸 또 우린 당연하게 받아들여왔기에.
그러나 일단 첫 번째 트랙부터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깼다. 신나는 드럼 비트의 <모여라>.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응원가 느낌의 곡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힙합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자니 이건 힙합이 아니다. 이건 뭐, 뭐지? 그래. 아날로그소년는 거침없이 퓨전을 추구한다. 그는 인디씬의 뮤지션이면서도 주류음악인 '힙합'을 가감없이 차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인디가 힙합이랑 이토록 이질감 없이 섞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두 번째 트랙인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앞서 말했던 서로 다른 장르의 화학작용(퓨전)이 극대화 된다. '오~ 기쁜 우리 젊은 날 눈물겹구나.'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 그런데, 가사와는 달리 리듬은 너무나 해맑다. 희망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진짜배기 노른자 우린 돌멩이를 씹어 넘겨'라는 가사라던지 '우리의 두 눈마저 반짝여 하늘에 활시위를 땡겨'와 같은.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젊은 날에 대한 희망곡이다.
세 번째 트랙인 <서울서울서울>. 아날로그소년은 경상도 촌놈이다. 노래는 '여가 서울이라?'라는 아날로그소년의 구수한 사투리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촌놈이 서울에 바치는 노래가 바로 이 ‘서울서울서울’이다.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아날로그소년의 사투리만큼이나 실감나는 서울에서의 경험들을 소재로 한 이 노래는 듣는 내내 유쾌하게 만든다.
꿈을 향한 질주는 마치 마라톤과도 같다고 표현한 ‘마라톤’은 본 작의 주제 혹은 정신에 가장 걸맞다.
여섯번째 트랙인 <내 세상>과 그 다음 트렉인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뜨겁다>는 좀 더 세련된 음악적 테크닉으로 노래를 한다. 좀 더 차분하게. 청춘을 느끼는 노래. 앞의 트렉이 청춘을 고양하는 노래라면, 이 트렉의 다음부터는 좀 더 진중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청춘을 즐기고, 청춘을 이해하는 노래들이다.
청춘이란 원래 말 그대로 젊고, 푸르며, 싱그럽다. 그러나 역시 무언가 불안정한 시기다. 게다가 사회적 구동은 여린 청춘을 자꾸만 채찍질하고 아프게 한다. 그늘은 그들의 발 아래에서 자란다. 그림자처럼 떨쳐낼 수 없는 영원할지도 모를 그늘. 그러나, 멈추지 않는 것이 또한 청춘이다. 청춘은 나아가야 한다. 빠른 '행진'만이 우리를 보우할 힘이다. 행진, 행진, 행진!
인디뮤지션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이 앨범에 피쳐링으로 참여한 가수들의 면면을 보자. 우주히피의 한국인, 좋아서 하는 밴드의 복진, 아키버드의 유연, 시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지금 홍대 인디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힙합음악에서 타 뮤지션과의 작업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의 인디뮤지션과의 조우는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이유인즉, 서로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아날로그소년의 음악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 배경에는 본 앨범의 총 프로듀서 김박첼라가 있다. 밴드적 작법을 힙합음악에 도입한 그의 유니크한 스타일은 전작 인디언팜과 포니테일에서 그 실력을 증명된 바가 있다.
힙합씬에서는 보기 드문 스타일의 음악과 인디뮤지션과의 콜라보, 신선한 동시에 낯선 이 작품은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데 모아진 요소요소들은 기세 좋게 멋진 화학작용을 뽐낸다. 2010년 하반기 가장 기대되는 앨범 중 하나인 아날로그소년의 <행진>, 꼭 놓쳐서는 안 될 앨범이다.(From 위드블로그 소개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