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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톺아보기

[문학] 편혜영의 소설집 『아오이가든』








 


악취를 악취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편혜영의 단편집 『아오이가든』
- 편혜영의 단편 「아오이가든」과 「시체들」을 중심으로

웃음은 발명되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필경 우울증을 앓는다.

이건, 냉소일까 아니면 진리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왔다. 생존의 문제는 의나 식이나 주의 문제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웃음의 유무에 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류다. 웃음이 발명된 이후 인간의 삶은 보다 인간다워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이러한 정황은 역설적으로, 세상에는 본래 웃음이 없다는 말로 통한다. 웃음이 없는 세상의 본성이란 차갑고 날카롭다. 한순간, 사람을 쉽사리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웃어야 한다. 그러니 웃음이 생존의 기본 요건이 된다.

편혜영의 소설집 『아오이가든』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던 까닭은 바로 위에 서술한 이유와 같다. 나는 애써 이 ‘잔혹한 현실’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편혜영은 그 잔혹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직시다. 그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얘기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편혜영이 『아오이가든』속에서 그리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독히 ‘하드고어’적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시체’로 치환(「시체들」등)되며, 혹은 ‘개구리’로 치환(「아오이가든」)되기도 한다. 세상엔 악취가 범람한다. 악취의 원인은 도통 알 수 없으며 혹은 인간들이다. 쓰레기들이 깊이를 알 수 없이 쌓여있고, 그곳에 뛰어드는 인물(「아오이가든」)을 통해서는 ‘혹 인간=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연상 작용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쓰레기을 담은 자루’(pp.36)처럼 보였던 것이 아닐까.

기실 ‘깊이를 알 수 없이 쌓인’ 쓰레기는 인간들의 무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오만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이, 문명이다. 언젠간 무너질 것이고 이미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문명 앞에 퇴행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폐경기가 지난 엄마가 생리를 하는 장면이나, 가랑이가 갈라진 채 ‘개구리’를 출산하는 누이의 모습 등이 그러한 ‘퇴행하는 인간’의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현대인들 사이에서 점차 치매가 유행하고 있다. 치매는 퇴행이며, 어쩌면 이 세상에 만연한 전염병인지도 모른다. 2,30대 치매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는 어딘지 ‘편혜영’스럽다. 자기 집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 해 휴대폰 주소록을 뒤적이는가 하면, 방금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쉽사리 포기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종 때문에 발생한 사회의 병리현상이다. 인간은 기술문명이 도래한 이래 줄곧 그것을 맹신하며 추종해왔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스스로 그것의 ‘노예’상태에 위치시켰다. 자연 앞에 항상 ‘피지배자’였던 인간은 과학기술을 알게 되면서 ‘지배자’의 위치에 올랐―다고 착각 했―고, 자신의 나약함을 망각한 채 그 거대한 힘 앞에 조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체르노빌-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조금은 깨어지는가 싶더니 아니, 여전하다.

편혜영은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간파한다. 그리고 그대로 드러낸다. 인간을 동정하지도 그렇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만으로도 그리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편혜영에게는 ‘악취를 악취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이것이 내가 편혜영을 좋아하는 이유다. ■